바울은 에베소서를 통해 사람의 마음에 세워진 “중간에 막힌 담”을 먼저 보여준다. 그 담은 혼자 있을 때만이 아니라 사람들 한가운데서도 느껴지는 밖-안의 거리감이다. 바울은 에베소의 이방인들이 본래 은혜 밖, 약속 밖,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음을 기억시키며, 이것이 단순한 종교 유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사는 존재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은 돈이 없어도 진짜로 두려운 것은 마음에 붙잡을 소망이 없는 상태다.
그러나 본문은 결을 바꾼다.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가까움의 근거는 사람의 성실이나 착함이 아니라 예수의 피다. 바울은 예수님을 “우리의 화평”이라 부른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자신이 평화이시다. 그래서 예수의 육체로 “막힌 담”이 무너졌고, 원수 됨이 끝나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렸다.
이 평화는 이야기 속에서 더 또렷해진다. 여리고의 삭개오는 사람들 눈에 이미 담 밖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름을 부르시고 집에 들어가셨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셨다. 멀리 있던 자가 가까워지고, 죄인으로 밀려났던 자가 가족이 되는 장면이다.
그래서 본문은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한다. 교회는 취향과 성향이 맞아 모인 동호회가 아니다. 예수의 피로 가까워진 자들이 한 가족으로 모인 자리다. 가족이 되었다는 뜻은 이름표만 바뀐 것이 아니라 함께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로 허무신 담”을 다시 쌓을 수 없다.
바울은 화평을 분위기나 성격 차로 풀 수 있는 도덕적 기술로 보지 않는다. 화평은 십자가의 열매다. 예수 앞에 설 때 타인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보이고, 자신이 탕감받은 “일만 달란트”의 빚이 보인다. 큰 용서를 받은 자에게서 큰 용서가 흘러나온다.
끝으로 성령은 교회를 “함께 지어져 가게” 하신다. 교회는 완성형 건물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가는 거처다. 그래서 필요한 일은 분명하다. 담을 다시 쌓지 않는 것, 멀어진 이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 형식과 취향을 내려놓고 배려로 맞추는 것이다. 주께서 피로 가까이 부르신 사람들은 그렇게 한 세 사람, 한 가족으로 세워진다.
Key Takeaways
- 1. 멀리 있던 자를 피가 가까이함 그리스도의 피는 거리를 줄이는 상징이 아니라 실제 효능이다. 밖에 있던 자를 아들로, 나그네를 가족으로 전환시킨다. 사람의 노력과 성실이 아니라 피가 관계의 지도를 다시 그린다. 이 기억이 살아 있을 때 은혜가 메말라붙지 않는다. [06:52]
- 2.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화평 평화는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전에 예수님 자신이다. 그래서 평화는 상황 개선보다 인격적 임재에 먼저 붙는다. 그분이 가까워지면 담이 낮아지고, 그분이 중심에 앉으시면 원수 됨이 끝난다. 화평의 비결은 그분의 더 가까움이다. [07:40]
- 3. 가족이면 담을 다시 못 쌓음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는 말은 공동 성(姓)이 생겼다는 뜻이다. 같은 피로 가까워졌다면 사적 기준과 감정으로 거리 두기를 정당화할 수 없다. 가족됨은 불편을 감수하는 사랑의 체질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회피 대신 먼저 다가감이 정답이다. [14:35]
- 4. 화평은 십자가의 열매다 분위기가 좋아져서 생기는 화해는 오래가지 않는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먼저 보이고, 탕감받은 빚의 크기를 기억할 때 용서는 흘러나온다. 타인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낮아져서 평화가 시작된다. 열매를 원한다면 뿌리에 다시 서야 한다. [18:10]
- 5. 함께 지어져 가는 거처 교회는 완성품이 아니라 진행형 공사장이다. 미완과 서툼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함께성을 확인하는 자리다. 성령은 연결을 통해 거처를 세우시니, 배려와 조율은 영적인 건축 기술이다. 담을 허무는 습관이 곧 거처를 세우는 손놀림이다.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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