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2장을 통해, 요단 동쪽 지파들의 7년 헌신과 돌아가는 길에 세운 재단을 둘러싼 오해를 나눴습니다. 이미 기업을 받은 루우벤, 갓, 무나세 반 지파는 아홉 지파 반을 위해 선봉에 서서 끝까지 싸웠고, 모든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요단가에 거대한 재단을 세웠습니다. 이를 본 서쪽 지파들은 충격과 분노로 군대를 소집하고, 비느하스를 선봉에 세워 심판하러 나아갑니다. 문제는 분노가 틀렸느냐가 아니라, 그 누구도 먼저 물어보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왜 그 재단을 세웠는가?” “그 마음의 두려움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 없이, 거룩한 명분으로 곧바로 심판의 자리에 올라선 것이지요.
동쪽 지파들의 해명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 재단은 제사를 드리려는 반역의 재단이 아니라, “우리는 영원히 하나입니다”라는 신앙의 정체성을 기억하기 위한 증거의 재단이었습니다. 시간과 강이 우리를 갈라놓아도, 하나님 백성이라는 이름으로 잊히지 않기 위한 표징이었습니다. 비느하스는 그들의 말을 끝까지 들었고, 좋게 여겼으며, 싸움의 칼을 거두었습니다. 재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공동체는 찢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재단들이 보입니다.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직장에서 “저건 기준에 어긋나” 보이는 장면들 말입니다. 말이 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관계를 끊고 공동체를 무너뜨린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은 아닙니다. 거룩한 명분은 칼이 되지만, 거룩한 마음은 약을 만듭니다. 먼저 묻고, 끝까지 듣고, 헤아리고, 수긍할 수 있을 때, 하나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비느하스처럼 경청하고, 증오의 창 대신 이해의 귀를 들고, 우리의 공동체를 사랑으로 지켜갑시다.
Key Takeaways
- 1. 은혜의 기억이 분노 앞에서 얼마나 쉽게 사라지는지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7년의 헌신이 있었음에도, 한 장면의 오해가 감사의 기억을 지워버렸습니다. 우리는 감정이 아니라 기억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관계의 역사와 은혜의 맥락을 먼저 불러내십시오. [10:48] - 거룩한 명분은 귀를 닫게 하고, 거룩한 마음은 귀를 엽니다. 자녀와 동료에게 “정답”을 들이대는 순간, 우리는 비느하스의 창을 쥔 심판자가 되기 쉽습니다. 묻기 전에 단정하지 말고, 듣기 전에 결론내리지 마십시오. 경청은 사랑의 첫 번째 표현입니다.
- 오해의 재단은 반역이 아니라 기억의 증거일 수 있습니다. 동쪽 지파는 잊힘의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다”라는 신앙의 표지를 세웠습니다. 누군가의 불편한 행동 뒤에 숨은 선한 의도와 상처의 사연을 찾아보십시오. 판단보다 해석의 자비가 공동체를 살립니다.
- 말은 사실일 수 있어도, 방식이 복음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기도 제목이라는 명분으로 전하는 소문은, 결국 칼날처럼 돌아와 공동체를 상하게 합니다. 정말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골방으로 가십시오. 기도가 안 된다면, 침묵을 배우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 결과가 바뀌지 않아도, 마음이 바뀌면 공동체가 삽니다. 재단은 그대로였지만, 비느하스는 끝까지 듣고 좋게 여겼고, 싸움은 멈췄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사랑으로 지키는 정의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명분보다 화해를 선택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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