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신비”를 열어 보인다. 이방인의 충만이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은 완고해졌지만, 그것이 은밀한 실패가 아니라 구원의 통로였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완고함으로 복음이 이방에 흘렀고, 그 은혜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역설 속에 빛난다. 그러므로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교만은 금물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언약은 변개되지 않으며, 그분의 생각하심과 경영하심은 반드시 이룬다. 우리의 구원 또한 그 확실성 위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 헛것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많이 아는 것이 순종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씀에 단순히, 깊이, 기쁘게 순종하는 자가 진짜 지혜자다. 신비는 이해의 과제가 아니라 순종의 자리에서 열린다. 불신과 불순종은 중립 지대가 아니라 이미 심판이다. 빛이 와도 어둠을 더 사랑하면 그 자체로 정죄 아래 머무는 것이다. 반대로 비를 갈망하듯 은혜를 향해 나와 맞이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실체가 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를 긍휼로 이끄신다. 때로는 붙잡은 것을 빼앗겨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생각한다. 그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은 복을 재구성하신다. 그러니 “왜 이렇게 하시나” 따져 이해하려 들기보다, “지금 무엇을 순종할 것인가”로 반응하자. 찬양 또한 진리를 근거로 해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다 솟아오르는 고백이 찬양의 본질이다. 감정의 파도를 따르는 노래가 아니라, 말씀의 파도에 실린 노래가 교회를 세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빚진 분이 아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을 주께 돌려드리는 일일 뿐이다. 그러므로 드림은 거래가 아니라 기쁨이며 자유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 이 진리 위에서 거룩을 우선하고,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자. 때와 형편을 넘어,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다.
Key Takeaways
- 1. 이방의 충만과 이스라엘의 신비 하나님은 유대인의 완고함까지도 구원의 강을 넓히는 수로로 사용하신다. 이방의 구원이 이스라엘의 시기와 회복을 촉발시키는 역설 속에 하나님의 깊은 지혜가 흐른다. 그러므로 구원은 누가 먼저냐의 경쟁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더 크게 드러나는 긍휼의 연쇄다. 이 신비 앞에서 교만은 사라지고 감사만 남는다. [12:39]
- 2. 참 지혜는 순종에서 시작 이해가 아니라 순종이 문을 연다. 많이 알아도 마음이 굳으면 진리 앞에서 멀어진다. 말씀을 “왜”보다 “예”로 받는 단순한 순종이 삶을 지혜롭게 만든다. 신비를 해부하지 말고, 말씀을 실천하여 신비 속으로 들어가자. [34:13]
- 3.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언약은 중도 포기나 번복이 없다. 그분의 부르심이 우리의 불안보다 크고, 그분의 은사가 우리의 결핍보다 깊다. 그러니 흔들릴 때, “내가 얼마나 붙들었나”보다 “그분이 얼마나 확실히 붙드시는가”를 보라. 언약의 확실성이 순종의 담대함을 낳는다. [24:13]
- 4. 불신 자체가 이미 심판 빛이 임해도 어둠을 더 사랑하면 그 선택 자체가 심판이다. 은혜는 공평하게 내리지만, 나와 맞는 자만 젖는다. 회피는 중립이 아니라 쇠사슬이며, 변명은 자유가 아니라 감옥의 다른 이름이다. 빛으로 나오라—그것이 심판에서 생명으로의 이행이다. [29:59]
- 5. 모든 것은 그분께로 돌아간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 그래서 드림은 거래가 아니라 귀환이며, 감사가 곧 영광의 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빚지지 않으나, 우리는 받은 것으로 기꺼이 돌려드린다. 이 질서가 탐욕을 꺾고 예배를 회복한다. [3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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