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9장 6-7절은 철저한 영적 어둠 속에서 빛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여 준다. 아하스 시대의 배교와 우상숭배로 나라가 흔들릴 때, 하나님은 칼과 외교가 아니라 “한 아기”를 약속하셨다. 이것이 성탄의 신비, 곧 성육신이다. 아기는 참된 인간성의 표지다. 실제로 태어나 자라며, 배고프고 피곤하고 고난을 겪은 분. 동시에 그분은 “아들”로 불리시는 영원하신 분으로, 창조되지 않고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시다.
그의 어깨 위에 정부가 놓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안에서 이미 임했다는 뜻이다. 그 나라는 영토보다 통치와 백성으로 드러나며, 부활하신 주는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 곧 최고의 권위 자리에서 교회를 다스리신다. 신자는 그 통치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이분의 이름들은 그의 사역을 설명한다. “기묘자, 모사”는 놀라움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의 표지이자, 곁에서 돕고 변호하시는 상담자의 모습을 나타낸다. 예수는 원 보혜사이시고, 또 다른 보혜사인 성령을 보내셔서 백성을 끝까지 돕게 하셨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성자의 신성을 주저 없이 선포하며,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삼위의 구분을 흐리는 표현이 아니라, 백성을 영원히 보호하시는 아버지 같은 왕의 품성을 가리킨다. “평강의 왕”은 단순한 심리적 안정이 아니라 죄의 해결과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비롯되는 샬롬, 곧 질서와 조화, 온전함의 상태를 가져오신다. 십자가로 죄를 담당하시고 새롭고 산 길을 여심으로, 누구든 믿음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의 나라는 끝이 없고, 정의(사회적 의)와 공의(하나님의 의)가 어긋나지 않고 하나로 서는 나라다. 결국 이 모든 일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으로 성취된다. 그러므로 질문은 분명하다. 이 아기는 누구인가? 전통의 일부인가, 감동의 소재인가, 아니면 지금도 다스리시는 주님과 왕인가. 응답은 하나: 믿음과 감사로 그분을 영접하고, 엎드려 순종하는 것이다.
Key Takeaways
- 1. 어둠 속에 오신 한 아기 정치와 군사의 해법이 막힌 때, 하나님은 힘있는 장수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아기를 보내셨다. 구원의 길은 인간의 계산을 넘어, 하나님이 선택하신 낮아짐을 통해 열린다. 빛은 어둠의 중심에서 시작되며, 그 빛의 이름이 예수다. 하나님의 열심이 그것을 이룬다. [05:42]
- 2. 예수님, 완전한 하나님이자 사람 예수는 실제 역사 속에 아기로 태어나 참 인간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 기원은 태어남에 있지 않고, 태초부터 계신 말씀으로서 곧 하나님이시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멀리서 관찰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정을 짊어지기 위해 우리 가운데 장막 치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그분의 인격 자체에 뿌리내린다. [11:40]
- 3. 원더풀 카운셀러의 위로와 변호 예수의 사역은 경이로움을 낳는 능력과, 곁에서 돕는 상담·변호의 품성으로 드러난다. 그는 원 보혜사이시고,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 우리의 연약을 도우신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분은 우리의 변호인이며, 일상의 무거운 짐 아래서는 우리 영혼의 위로자다. 기적보다 더 큰 은혜는 그의 동행이다. [18:41]
- 4. 샬롬을 이루는 십자가의 평강 성경의 평강은 감정의 고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시작되는 전인적 온전함이다. 예수는 십자가로 죄를 해결하여 평강의 근원을 열었다. 이제 누구든 그가 여신 새롭고 산 길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으며, 그 길에서 평강은 상황을 초월해 자란다. 화목이 먼저이고, 그 열매가 평강이다. [25:05]
- 5. 정의와 공의로 세워질 나라 예수의 나라는 사회적 정의와 하나님의 의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선다. 세상에서는 둘이 종종 충돌하지만, 메시아의 통치 아래선 일치한다. 교회는 그 나라의 표지로, 지금 여기서 정의와 공의를 맞물리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장차 올 나라를 미리 보여주는 삶이다. [2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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