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편은 현실과 일상을 피하고 싶고, 심지어 하나님의 얼굴도 피하고 싶은 마음 앞에서 시작한다. 다윗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까”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죄와 수치와 고난과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정말 숨고 싶은 사람의 탄식이다.
시편 139편은 1절부터 6절까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7절부터 12절까지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13절부터 18절까지 기묘하게 지으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그중 7절부터 10절은 이 시편의 심장부처럼 다윗의 영적 좌표를 보여준다. 다윗은 하늘 위, 스올 아래, 새벽 날개, 바다 끝이라는 네 자리를 말한다. 하늘은 은혜와 거룩의 높이처럼 보이지만, 그 꼭대기에도 언제 추락할까 하는 불안이 있다. 스올은 죄책과 오염과 절망이 이불처럼 덮이는 자리다.
새벽 날개는 단순히 새가 날아가는 그림이 아니라, 수평선 위로 펼쳐지는 아침 햇살이다. 다윗은 그 햇살을 걷어치우고 싶어 한다. 내일이 소망과 기쁨으로 오지 않고, 차라리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는 극한 무기력의 자리다. 바다 끝은 하나님의 시선과 통치가 닿지 않는다고 여겨졌던 곳이다. 요나가 도망간 곳처럼, 다윗도 하나님의 얼굴 밖으로 숨고 싶은 좌표를 말한다.
그러나 본문은 9절에서 멈추지 않고 10절로 간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인도하시고, 주의 오른손이 붙드신다. 하나님의 한 손은 곁에 앉아 충분히 기다려 주시는 손이고, 하나님의 오른손은 다시 바다 끝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강하게 붙드시는 손이다. 말레이시아가 조카의 죽음으로 바다 끝이 되었던 장로의 삶에도, 발달장애 판정 앞에서 주민센터 신청서를 쓰며 무너진 아버지의 마음에도, 하나님은 그 양손으로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광부가 땅을 샅샅이 뒤지듯 사람을 살펴 아신다. 하나님은 정보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아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상황과 응답만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눈동자는 가까운 거리에서 사랑하는 존재를 담는 눈이다. 광야와 황무지에서도 하나님은 한순간도 눈동자에서 사람을 놓친 적이 없으시다.
Key Takeaways
- 1. 거기서도 주의 손이 온다 하나님의 임재는 가장 경건해 보이는 자리에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다윗의 고백은 바다 끝, 스올, 무기력의 아침에도 주의 손이 먼저 와 있다는 사실을 붙든다. 신앙은 숨어 있는 사람의 의지보다, 숨어 있는 사람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손이 더 강하다는 것을 배우는 자리다. [27:22]
- 2. 새벽 날개를 걷어치우고 싶을 때 새벽 날개는 내일의 빛이 아니라, 때로는 다시 살아야 하는 부담처럼 느껴질 수 있다. 다윗의 언어는 믿음 좋은 사람도 아침이 두려운 날을 지난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무기력 자체를 정죄하기보다, 그 자리까지 찾아와 말없이 곁에 앉으시는 분으로 드러나신다. [12:31]
- 3. 하나님의 오른손은 놓지 않는다 본문의 “붙드시리이다”는 가볍게 손을 얹는 정도가 아니라 강하게 붙잡는 말이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다시 바다 끝으로 고꾸라지지 않도록 붙드는 사랑이다. 그 붙드심은 사람의 결심보다 깊고, 사람의 회복 속도보다 오래 기다린다. [29:51]
- 4. 바다 끝도 은혜의 자리가 된다 말레이시아는 한 사람에게 상처와 분노의 이름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바다 끝을 다시 사랑을 전하는 자리로 바꾸셨다. 용서는 감정을 지워버리는 일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이 이해되지 않는 마음을 붙들고 순종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나님의 지독한 사랑은 상처의 지명을 사명의 지명으로 다시 부르신다. [31:54]
- 5. 하나님의 눈동자에 담긴 존재 눈동자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랑하는 존재를 담는다. 하나님이 눈동자같이 지키신다는 말은 멀리서 지켜보는 감시가 아니라, 가까이 두고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사랑이다. 광야와 황무지에서도 성도의 모습은 하나님의 눈에서 사라진 적이 없다. [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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