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사랑이 마지막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받은 사랑에서 멈추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자리와 다음 세대를 품는 자리를 지나, 결국 옆을 지나가는 사람에게까지 흘러가야 한다.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 앞에서 이웃의 정의를 완전히 바꾸신다. 이웃은 정해진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되어주는 사람이다.
율법교사는 영생을 묻지만, 그 질문은 순수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질문이었다. 율법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다시 묻는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은 사랑의 경계선을 긋고 싶은 마음이다. 어디까지 사랑해야 하고, 누구까지 책임져야 하는지 정하고 싶은 마음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여주신다. 그 길은 험하고 위험한 길, 강도하기 좋은 길이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간다. 부정함을 피하려 했을 수도 있고, 강도를 무서워했을 수도 있고, 바빴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본문은 이유보다 사실을 남긴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안 도와준 것이다. 그럴듯한 이유는 결국 “핑계에 하나님의 은혜의 옷을 입힌 것”이 될 수 있다.
사마리아인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준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는 관계였지만, 사마리아인은 쓰러진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긴다. 사마리아인은 가까이 가고,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우고, 주막으로 데려가고, 비용을 지불한다. 사랑은 스쳐 지나가는 동정이 아니라 시간과 돈과 위험을 감수하는 실제 행동이다. 사랑은 말로만 “기도할게요” 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으로 손을 내미는 것이다.
예수님은 질문을 바꾸신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가 아니라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이다.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는 자신을 증명하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사랑이 흘러가게 해야 한다. 죄로 상하고 쓰러진 사람에게 예수님이 가까이 오셨고, 상처를 싸매셨고, 안전한 곳으로 옮기셨고, 십자가로 값을 다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Key Takeaways
- 1. 이웃은 되어주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냐”는 질문을 “누가 이웃이 되어주겠느냐”로 바꾸신다. 사랑은 대상을 분류하는 일이 아니라, 쓰러진 사람 곁으로 다가가는 역할이다. 경계선을 긋는 질문은 자기를 옳게 보이게 할 수 있지만, 자비를 베푸는 행동은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낸다. [13:02]
- 2. 핑계는 사랑을 대신하지 못한다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을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이 남기는 사실은 단순하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냥 지나간 것이다. 신앙적인 이유처럼 보이는 말도 고통 앞에서 몸을 빼면, 결국 은혜의 옷을 입은 핑계가 될 수 있다. [06:34]
- 3. 사랑은 손해를 감수한다 사마리아인은 가까이 가고, 상처를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우고, 돈을 지불했다. 사랑은 편할 때만 하는 감정이 아니라 시간과 비용과 위험을 내어주는 실제 행동이다. 성경의 사랑은 단쪽짜리 사랑이 아니라, 대가를 치르는 사랑이다. [22:03]
- 4. 받은 사랑이 흘러간다 예수님은 죄로 상하고 쓰러진 사람에게 친히 다가오셨고, 십자가로 값을 다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성도의 사랑은 자기 의를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이 이어지는 통로다. 교회가 오래 서 있는 이유도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라, 누군가가 낯선 땅에서 사마리아인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2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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